정류장 전광판에는 더 이상 도착 예정 시간이 뜨지 않았다. 붉은 글씨가 있던 자리에는 꺼진 화면의 검은빛만 남아 있었다. 지우는 배터리가 7퍼센트 남은 휴대폰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전원을 껐다. 불을 켜 두어도 달라질 것이 없었다. 받아야 할 연락도, 보내야 할 연락도 이제는 없었다. 밤 열한 시 사십 분, 도시는 막 문을 닫은 가게처럼 조용했다.
벤치 반대편 끝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종이 상자를 올려놓은 채였다. 상자 옆면에는 회사 로고가 인쇄되어 있었고, 그 위로 선인장 화분의 가시 하나가 삐죽 나와 있었다. 지우는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사무실 책상 위의 물건들을 쓸어 담은 상자였다.
“마지막 버스, 방금 갔어요.”
여자가 앞을 본 채로 말했다. 지우를 향한 말인지 허공을 향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지우는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돌렸다.
“아, 네. 그런 것 같더라고요.”
“저는 십 분 전부터 알았어요. 그런데 일어나기가 싫어서.”
여자가 웃었다. 웃음이라기에는 숨이 조금 빠져나가는 소리에 가까웠다. 지우도 따라 웃을 뻔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다 말았다. 둘 사이에 벤치 두 칸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낯선 사람과 나누기에 적당한 거리였다.
“걸어가면 어디까지 가야 해요?”
“저는 사십 분쯤요. 강 건너.”
“저는 이십 분쯤인데.”
그 말이 끝나자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십 분이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인데도 지우는 일어나지 못했다. 집에 가면 불을 켜야 하고, 불을 켜면 오늘이 끝나 버릴 것 같았다. 어쩌면 오늘 같은 날은 끝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같은 방향이면 같이 걸을래요?”
먼저 일어난 쪽은 여자였다. 상자를 한 팔로 고쳐 안으며 말했다. 부탁이라기보다는 그냥 제안이었다. 지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일어났다. 걸음을 떼자 벤치의 차가운 기운이 허벅지에서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둘은 횡단보도를 건너 강 쪽으로 난 길로 접어들었다. 가로등은 간격이 일정하지 않아서 불빛과 어둠이 번갈아 나타났다. 지우는 그 번갈음에 맞추어 걸었다. 불빛 아래에서는 발소리가 작아지고 어둠 속에서는 커졌다.
“오늘이 마지막 출근이었어요.”
여자가 먼저 말했다. 지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상자를 보고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육 년 다녔는데 짐이 이게 전부더라고요. 화분, 머그컵, 충전기 두 개, 그리고 누가 쓰다 만 포스트잇.”
“생각보다 적네요.”
“그렇죠? 육 년인데. 그래서 좀 웃겼어요. 퇴근길에 상자를 안고 걷는데, 아무도 저한테 무슨 일 있냐고 묻지 않더라고요. 다들 자기 갈 길 가느라.”
“저도 그래요.”
“네?”
“저도 누구한테 무슨 일 있냐는 질문을 못 받았어요. 오늘.”
여자가 걸음을 늦추며 지우를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마침 두 사람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여자의 눈가가 조금 붉었다. 오래 운 사람의 붉음이 아니라, 울 뻔하다가 참은 사람의 붉음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그 질문이 이렇게 간단한 문장이었다는 사실이 지우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루 종일 누군가 해 주기를 기다렸던 말이 낯선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지우는 한참 대답을 고르다가 결국 가장 정직한 문장을 꺼냈다.
“사과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에요.”
“누구한테요?”
“오래 연락 안 한 친구요. 삼 년 전에 제가 말을 심하게 했거든요. 그 뒤로 서로 연락을 안 했어요. 오늘 갑자기 그 생각이 나서 친구네 집 앞까지 갔어요.”
“그래서요?”
“문 앞에 서서 초인종 위에 손가락을 올려놨는데, 누르지를 못했어요. 이십 분을 그렇게 서 있었어요. 안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웃음소리도 났고. 그걸 듣는데 제가 들어가서 분위기를 깨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냥 왔어요?”
“네. 그냥 왔어요.”
여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둘은 다리 근처에 이르렀다. 강바람이 불어와 지우의 외투 깃을 흔들었다. 물 위에는 건너편 아파트 불빛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다리 위에는 차 한 대 보이지 않았다.
“저는 오늘 사직서를 내면서 그 말을 못 했어요.”
여자가 불쑥 말했다.
“무슨 말이요?”
“고마웠다는 말이요. 팀장님한테. 육 년 동안 저를 가장 많이 혼냈고 가장 많이 가르쳐 준 사람인데, 끝내 하지 못했어요. 그냥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하고 인사만 했어요. 형식적인 말로.”
“그건 아쉽겠다.”
“그쵸. 근데 이상한 게, 오늘 일어난 일 중에 제일 아쉬운 게 그거더라고요. 퇴사 자체가 아니라 하지 못한 말.”
둘은 다리 중간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난간에 팔을 얹고 강을 내려다보았다. 물은 어둡고 느리게 흘렀다. 어디선가 아주 멀리서 구급차 소리가 들려왔다가 사라졌다.
“그런데 있잖아요.”
지우가 말했다.
“말을 못 한 사람끼리 만난 거네요, 오늘.”
여자가 웃었다. 이번에는 숨이 아니라 소리가 났다. 작지만 분명한 웃음이었다.
“그러네요. 하지 못한 말의 정류장 같은 거.”
“마지막 버스는 갔지만.”
“마지막 버스는 갔죠.”
그 뒤로 둘은 꽤 오래 말없이 서 있었다.…